전두환과 윤석열의 계엄 병력 및 계엄 과정 비교
전두환과 윤석열의 계엄 병력 및 계엄 과정 비교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전두환과 윤석열 두 인물은 각각 12·12 군사반란(1979년)과 2024년 비상계엄 선포라는 사건으로 논란의 중
심에 섰습니다. 이 글에서는 두 사건에서의 계엄 병력 동원과 계엄 과정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살펴보겠습니다.
1.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하나회라는 군내부 사조직을 기반으로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며 군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전두환의 하나회는 주요 병력으로 제1, 3, 5공수특전여단이 투입하였습니다. 비하나회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총격전끝에 체포하였습니다.이들 공수특전병력은 서울 시내 주요 지역을 장악하며 반대 세력을 무력화했습니다.
전두환은 보안사병력으로 수사를 명목으로 한남동 공관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하고 육군본부와 청와대 경호실 등 주요 시설을 무력으로 장악했습니다. 이후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국회를 해산했습니다.
2. 윤석열의 2024년 비상계엄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의 입법 독재와 국가 전복 시도를 이유로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행위로 평가받으며 탄핵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특전사령관에게 명령하여특전사 예하 병력(707특임단, 공수여단 등) 약 1,500명이 투입하여 국회 장악을 시도하였습니다.
헬기와 군용 차량 등 대규모 장비가 동원되었으며, 일부 병력은 국회의원 체포를 위한 작전에 배치되었습니다.
계엄령 선포 직후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국회의원 언론인 등 주요 인사를 체포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국회 대체 기구를 계획하며 입법부를 무력화하려 했으나, 군의 소극적 대처와 시민들의 저항 덕분에 국회에서 계엄 해제를 결의하여 종료되었습니다.
비교: 전두환 vs 윤석열
병력 규모 | 수천 명 (공수특전여단 중심) | 약 1,500명 (특전사 및 공수여단) |
주요 목표 | 군부 내 권력 장악 및 정치적 통제 | 국회 무력화 및 입법부 견제 |
계엄 지속 기간 | 수개월 | 약 3시간 |
결과 | 신군부 집권 및 민주화 운동 탄압 | 대통령 탄핵 및 민주주의 회복 노력 |
정 리
전두환과 윤석열 모두 계엄령이라는 비상조치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시대적 배경과 국민 저항의 강도에서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전두환은 이를 통해 장기 집권의 기반을 마련하고 대통령이 되었으나, 윤석열은 단기간 내에 실패하며(헌재 판결문에서 '시민의 저항과 군의 소극적 대응 덕분'이라고 명시) 탄핵소추되어 결국 파면되었습니다. 두 사례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력 남용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